헐떡고개를 반쯤 올라오면서부터 조금씩 보이는 이 벽화는 어느새 저에게는 알 수 없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 건물에서 공부를 하고, 했던 것이 우쭐하기도 했었지요.
모르겠습니다.
그 벽화를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것 같고, 골똘히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벽화가 마음속에 담겨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합니다.
아마도... 그 벽화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나봅니다. 어디선가 함성이 들리고, 절로 뭉클해집니다.
#1 우연히 만난 책속의 청년
벽화 <청년>을 이제서야 조금이라도 바라보자고 마음먹은 것은 '피맛골'자료를 찾다가 만난 책. <길섶의 미술> (손수호, 한울, 1999) 덕분입니다. 그 책에 '피맛골'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책을 넘기다 너무나도 낯익은 벽화를 만났고 그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재빨리 복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한글자한글자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에는 <청년>을 '운동권 벽화의 간판'이라고 설명했고, 평론가 유홍준의 말을 빌어 '전남대의 <5월항쟁도> 한국외대의 <통일의 꽃>등 미술운동의 수단으로 등장한 벽화가 아닌 민족미술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대중적 확산작업의 하나'로 미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초세계적인 가치를 지향한다지만 결국 지배문화를 대변하는 모더니즘, 이를 거부하는 '커뮤니티아트'의 전형이라고도 말합니다.
20대 미술대학 학생들과 청년작가들의 그것은 벽화의 정치적 선전에 그 목적이 있었다. 시민 학생들에 대한 선전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1988년 제작된 경희대 문리대 건물의 벽화 <청년>은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과 민중 세상에 대한 염원을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학도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벽화는 벽그림제작공동위원회(미술교육과‘생활미술놀이공동체’, 만화패 ‘한그림’, 그림패 ‘쪽빛’)를 구성하여 제작되었다. 설문조사를 통한 디자인이 학교 측과의 협상을 통해 최종안이 확정되고 5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처음에는 흰 페인트를, 그 다음은 검은 타르를 옥상에서 부어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게 하는 두 번의 훼손을 시켰다. 또한 1999년에는 학교 측이 벽화를 철거하려 했으나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강력한 반발로 저지되기도 하였다.
* 크 기 : 11m x 17m
* 제 작 : 벽그림제작공동위원회(미술교육과 ‘생활미술놀이공동체’ , 만화패 ‘한그림’, 그림패 ‘쪽빛’)
* 장 소 : 경희대 문리대 건물
* 내 용 : 6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과 민중 세상에 대한 염원을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학도의 이미지로 표현해낸 이 벽화는 벽그림제작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작되었다. 설문조사를 통한 디자인이 학교측과의 협상을 통해 최종안이 확정되어 5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완성된 벽화는 처음에는 흰페인트를, 그 다음은 검은 타르를 옥상에서 부어 벽면을 타고 흘러내기게 하는 두 번의 훼손을 겪게 되었고, 두 번의 복구작업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또한 99년에는 학교측이 벽화를 철거하려 했으나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강력한 반발로 저지 되었다.
경희대 벽화 ‘청년’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현재 80년대 벽화운동 과정에서 그려진 대학 벽화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어 민주화 운동 및 벽화 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 되고 있다.
* 출 처 : 박영균
그리고 그곳에는 당시 <청년>의 훼손과 관련된 몇 장의 사진이 함께 있었습니다. 한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아! 출처에 있는 박영균은 당시 <청년>을 그리던 학생중 하나였고, 지금은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촛불소녀가 있습니다. 아직도 청년입니다. 역시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3 아쉬움은 대학주보로
약간 아쉽습니다. 이제서야 어느 정도 청년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한데... 좀 더... 알 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런 수난을 겪었다면, 대학주보에서 몇 가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어느덧 서고보관실에 있던 대학주보 1988년, 1989년, 1990년 묶음이 제 눈앞으로 옮겨져 왔고, 설레이는 마음에 한장한장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본다 했지만, 제가 다 찾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 눈에 보인 기사를 나열해봅니다.
기사를 찾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사진으로 찍었지만, 대학주보 홈페이지에 PDF로 서비스를 해놓았더군요. 사진이 정은 가는데, 깔끔과 가독성은 역시 PDF네요.
1989년 5월 29일자 대학주보 교시탑
처음으로 본 <청년>관련 기사입니다. 학생과 교수간의 다툼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툼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지만 잠시후 다른 기사에서 아주 약간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1989년 8월 28일자 캠퍼스 표정
위에 있는 5월 29일자 기사 작업대가 무단파손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너울대는 햇살 속 투명한 여름날 끝마친 벽그림이 빨간 스프레이 낙서로 훼손되었습니다. 이 훼손은 단순히 시작에 불과했지요.
1989년 9월 11일자 고황만평
페인트통을 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이고, 옥상에는 페인트 통이 놓여져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
1989년 9월 11일자 마당바위
위 만평과 같은 주보 마당바위에 실린 설진덕(철학2)의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 당시 벽화에 대한 약간의 진행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고황통일제가 한창일때 시작된 벽화작업 전, 설문조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학교측에서 모든 과정이 8천명 중 4천명 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후 어떻게 조사가 마무리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벽화작업이 진행되었고, 일부 교수님과 학생들이 열띤 논쟁을 벌었으며, 생명을 위협하는 작업방해공작(아마도 작업대 무단파손과 작업대 철사절취 사건), 붉은 스프레이낙서, 그리고 흰페인트 테러(?)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89년 9월 11일자
역시나 같은 그 날, 대책위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엄단, 복구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벽그림사수대책위원장이 박영균(미교4), 앞서 언급한 현재 경희대 미술대학교수인 점입니다.
1989년 9월 25일자
27일까지 벽그림 보수공사를 완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산확보가 어려워 엽서판매와 '국가보안법철폐와 구속 미술인 석박','벽그림사수'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89년 10월 23일자
아마도 예산문제로 당초 27일이 완료목표였던 보수공사가 10월 14일이 되서야 완료가 되었던 듯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주 또 다시 벽그림이 훼손되고 맙니다. 시꺼먼 콜타르였다고합니다.
이때 '검은 피 흘리는 벽그림에 던진 비수가 우리 가슴에 박혀 뜨거운 눈물과 분노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라고 쓰여진 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하고(길섶의 미술)...
이후 콜타르를 벗겨내고 페인트를 입히고 방수처리까지 했다고합니다. 이 복구작업때에는 횃불아래서 작업을 하였고, 완성후에는 철사롤로 옥상울 둘러싸는 한편 심야에는 규찰대까지 편성해 주변을 감시했다고(길섶의 미술)...
1999년 2월 22일자
10년동안 잠잠하던 벽화는 다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문리대 외벽공사와 관련해 박병수문리대학장은 '당시 시대상황을 그려낸 것에 불과하며 오늘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고 철거를 대학본부에 요청하지요.
총학생회의 항의방문과 유인물배포 등으으로 결국 학생들과 협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벽그림을 철거하지 않을 것을 통보받지만 이영우 사무처장이 '추후협의와 공사'를 언급한 것처럼, 신용우 학자추사무국장이 언급한 직접공문등에 대한 유감표명 등 뭔가 찝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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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99년에서 10년이 지난 2009년 청년벽화는?
10년이 다시 지났습니다. 다행히도 <청년>은 그 자리에 잘 있습니다.
하지만 변한게 있습니다.
요즘(?)지나가는 학생들은 무섭다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제가 일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6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과 민중 세상에 대한 염원을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학도의 이미지라는 <청년>벽화가 어느새 '6월', '통일', '민중', '청년'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합니다.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이야기하지 않거나...
또 하나 변한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아있으면 지금부터라도 이야기를 하고, 6월을 말하고, 통일을 꿈꾸고, 민중을 고민하고, 청년처럼 살면 됩니다. 2007년 경희대학교에서는 마스터플랜을 발표합니다.
출처 : 경희대학교 대학주보
이 조감도를 보면, 현재 <청년>벽화는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문과대학이 방향을 틀어 길게 연결되고 정경대학과 터널(?)로 이어지는데, 바로 그 터널자리고 <청년>이 있는 위치입니다.
아름, 쾌적, 21세기를 선도, 학문적 권위 재건, 효율적, 국제화, 글로벌....
그런그런 말들 속에 팔뚝이라 불리는 경희대학교 문리대벽화 <청년>은 어떻게 될까요?
얼마전 다녀온 피맛골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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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이 지나 갑니다.
바람이나 쐬러 다녀와야 겠습니다.
덧) 제가 1학년때, 한 선배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년은 나이가 어려서 청년이 아니라 마음이 푸르러서 청년이라고...
회기역에서 경희대지리학과까지 (마을버스편)이었습니다.
이 길은 제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길입니다. 10번중에 8번은 이렇게 가는 듯 싶습니다.
제가 새내기였던 2000년에도 마을버스 2번은 이렇게 달렸었는데요,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몇 개 있습니다.
첫번째로 마을버스가 돈을 받았었습니다. 300원이었던가? 지하철은 정액권을 이용했고요. 그래서 자주타지 않았고 급할때만 타곤했었습니다. 지금은 환승할인이 되어서 뭐 바쁘지 않아도 타는 길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길이름입니다. 흔히 이 길은 '복관길'이라고 불렀습니다. 복지회관과 경희유치원사이로 난 길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유치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경영대학'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구글지도에는 한창 경영대학을 짓고 있을 때군요. 지금은 '벽돌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는 영상을 보시면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미니슈퍼'ㅋ
음... 이 '미니슈퍼'... 예전에는 지리학과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점이 문을 닫으면 항상 이 곳을 이용했었는데...
지금은 더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습니다. 음... 뭐라고 해야할까요...
갑자기 씁쓸해집니다.
이번 걷는 풍경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8걸음마다 사진 한장씩 찍었습니다. 마을버스위에서는 연속촬영(사진기는 파나소닉lx2)을 이용했고, 셔터를 꾸욱하고 계속 누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략 계산을 해본결과 마을버스 속력을 대략 시속 30km라 가정하면 연속촬영은 약 0.5초당 1장씩 찍어야 8걸음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의 연속촬영이 평균 초당 1장씩인점, 그리고 버스의 진동때문에 셔터를 놓친적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서 지난 걷는풍경_1(한일장골목편)과 직접적인 속도비교는 불가능 할 듯 합니다.
원래 계획은 셔터속도까지 맞춰서 직접적인 속도 비교까지 하려했었지요. 아쉽습니다ㅎ
언제나 자극을 주시는 따끔민수햇님의 블로그에 글하나가 올라왔습니다(http://happygeo.com/tc/79). 사진으로 재현된 공간이라는 걸쭉한 제목의 이 글은 민수햇님의 사진의 재발견, 재해석이라고 바꿔 말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민수햇님의 잠시 잊었던 열정 재발견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괜히 덩달아 저도 마구 힘이 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작업을 해본 저의 생각으로... 디카반과 민수햇님의 중학생친구들의 죽음(?)이라 할 수도...
우선, 함께 고생한 달팽미소, 오랜만에 좋은 것을 가르쳐준 원도걸스와 청천석환, 오류를 찾아준 위액성국과 따닥따닥클릭소리를 참아준 성국현주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 작업은 회기역에서 경희대학교 지리학과가 있는 이과대학건물까지 UrbanEarth처럼 8걸음마다 눈높이로 사진을 찍고 이를 프리미어를 이용해 빠르게 연결시킨 것입니다.
회기역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정말 많은데요, 특히 이과대건물은 외대역에서 내리는 것이 더 빠르다라는 것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기도 했지요.
어쨌든, 저와 달팽미소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걸은 이 길은 9년전... 제가 새내기일때 하늘같은 94학번 선배가'때로는 마을버스보다 더 빠른 길'이라며 알려준 길입니다. 지리학과의 벗 '한일장(지금은 한일모텔)'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이지요. 물론 지금은 마을버스 편수도 많아졌고 배차간격도 짧아져서 '언제나 마을버스 보다 더 느린 길'이 되어버린 길입니다.
경희대를 찾아오시는 분에게는 다소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함께 따라 걸으면 재미는 있을 듯 하고...
가까운 미래에는 지도가 이런 느낌이 되겠구나 하고 감상에 빠지기도 하고...
민수햇님의 말처럼 이것이 언젠가 회기역에서 경희대, 그리고 이과대건물의 기록물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아! 이미 경희대에서는 현재 노천극장과 대운동장을 없애고 이과대이전 등 마스터플랜을 계획했지요ㅎ
암튼 작업하는동안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문득... 서울 성곽을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미친(?) 생각을 합니다.
회기사거리로올라오다가 오른쪽골목으로 / 한일장이보이고
곱창나라왼쪽길로 / 그러다보면 나오는 그나마 큰 길에서 BUD와 틈새라면사이 골목으로
메이킹!
덧)
이거 어렵네요. You Tube에 동영상을 올리면 사진한장한장이 다 살지않고, daum에 올리면 마지막 크레딧이 안보이네요. 허허허
살짝 난감합니다.
덧2)
총 241장의 사진, 8걸음... 총 1920걸음...
아... 대충 키가 나오나요? ㅎ
흔히 '3층'이라고 부르던 그곳에... 저렇게 이름이 세겨진 것은 2007년 5월로 기억합니다.
그때 깜짝놀라서 사진을 찍었었거든요.
그때 이후부터... '3층'은 '길쭉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누가 써놓았을까?
하지만 그 써놓았던 사람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해합니다.
'3층'은 문리대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포근한... 아니... 많이 친숙한... 음... 마구 끌리는... 중독성있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언젠가 석사논문을 쓰고 으레 쓰는 '감사의 글'에 '3층'을 쓰려했었으니깐요.
저에게 '3층'이 고마운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처럼... 저 글을 써놓은 친구는 '우연히 만난', '길쭉한', '도시'였나 봅니다. 왜 그런지는 그 친구만이 알겠지요.
우리는 어떤 지역에 대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속에서 그 지역은 낯선곳에서 친숙한 곳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어떤 지역에 대한 경험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느낌을 장소감이라 합니다. 이러한 장소감은 장소에 대한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Relph, Fritz, Allen등 많은 학자들이 이 장소감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공통적인 것은 모두 장소를 바라보는 인간 주체를 중시하고 있고, 장소감은 사회적 성격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며,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을 띄고 있다는 겁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글을 쓰니깐... 또 '길쭉한 나!의! 도시'가 보고 싶어지네요. 댕겨오겠습니다ㅎ